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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blanc(2003-05-10 22:44:21, Hit : 4438, Vote : 992
 다시 본 [귀를 기울이면]-'웨스트 도쿄'의 풍광

여러번 말했지만, 난 미야자키 하야오가 별로다. 정묘한 그림과 배경, 문제 의식에는 공감 하면서도 만화로서 매력을 느끼며 빠져서 본 적이 거의 없다.
그 사람의 유머 코드가 나랑 안맞는다고 느끼며, 무엇보다 그의 여성 캐릭터들이 대부분 맘에 안든다. 키키의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듣기 싫었고, 철부지 메이는 짜증났으며, 치히로의 급작스런 의젓한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우시카? 걔는 나의 이해범주를 애초에 벗어난 캐릭터인데다 마지막 부활장면은 너무 끔찍했다.(‘네가 이래도 감동을 안 받을테냐'하는 말이 내 목을 조르는거 같았다) 
그가 그린 <붉은 돼지>의 눈부신 남유럽과 <키키>의 동화같은 북유럽, <토토로>의 이상향으로서의 일본시골이라는, 공간에 대한 매혹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최초로 ‘재미있다’고 느낀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너구리 합전>이었으며, 현재 내가 제일 좋아한다고 꼽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귀를 기울이면>이다.
순정만화풍의(원작이 소녀만화) 작은 성장물인 이 작품에는 큰 욕심도 화제도 없다. 장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씩 자각하면서 자신의 작은 꿈을 지키고 싶은 10대의 한 에피소드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세이지는 다소 건방지지만 귀엽고 심지가 곧은 소년이고, 시즈쿠는 평범하지만 결단력 있는 소녀다. 한마디로 애들이 둘 다 너무 귀엽다.

다시 본 <귀를 기울이며>에서 새로 발견한 것은 배경 도쿄와 계절에 따라 변하는 빛이 어우러진 풍광이었다. 도쿄는 주인공들이 살아 숨쉬는 현실의 공간으로서, 그리고 꿈이 이루어지는 이공간으로서 교차된다. 시즈쿠가 사는, 징그럽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서민 아파트, 전철, 야트막한 언덕길과 학교 가는 길이 존재하는 한편, 오래된 골동품가게와 도서관, 작은 바이올린 공방, 아늑하게 내려다보이는 ‘웨스트 도쿄’ 가 있다.
영화는 한여름에 초겨울까지 6개월 남짓한 시간을 따라가며,  그 계절에 맞는 빛, 시간에 따른 빛의 변화와 그 빛 속의 도시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시작은 한 여름 도쿄의 태양이었다.
여기저기 매미 소리가 들리고, 도시는 강렬한 햇빛과 짙은 그림자 아래 놓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여름 햇살은 아스팔트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같은걸 통해 드러나진 않는다. 아버지 도시락을 가지고 헉헉 거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시즈쿠를 보다보면 제법 더운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여름의 빛은 강한 그림자를 통해 더 잘 전달되는거 같다. 대낮의 짧은 그러나 짙은 그림자, 거리의 가로수의 무성한 그림자. 소년과 소녀의 첫 만남은 여름의 나무그늘이다.

두번째 빛은 초저녁의 빛이다.
몇번이나 앤틱 가게를 찾아오지만 허탕. 뒤에서 소년이 소녀를 부른다. 거리에는 뉘엿뉘엿 해가 지고 골목의 그림자는 길고 얕다. 소년의 얼굴에도 살짝 저녁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축대 위에 세워진 집에서 밑으로 산이 거의 없는 평평한 도쿄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때가 제일 아름다워’라고 소년은 말한다.
낮의 도시는 번잡하고, 밤의 도시는 화려하다. 그러나 해질 무렵의 도시라는건 확실히 특유의 우수가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웨스트 도쿄’는 밤과 낮의 경계에 고요하게 잠겨있다.

마지막 빛은 초겨울의 일출.
갑자기 나타난 소년은 다짜고짜 소녀를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다시 올라간다. 일출, 그리고 호호 입김을 불며 밑으로 펼쳐지는 도시풍경을 바라보는 두 사람. 그 빛 속의 현실인 ‘콘크리트 로드, 웨스트 도쿄’는 더 없이 아름다운 꿈의 공간이 되며 작품의 대미를 장식.

영화 속 케이오센 <스기노미야>역이 실재하는 곳인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모델이 된 도쿄 서부의 타마시 세이세키사쿠라가오카(聖蹟櫻ケ丘)역은 신주쿠에서 케이오센을 타고 4정거째라고 한다. 밑의 홈페이지에 가면 영화 장면에 맞춘 실제 거리 풍경을 볼 수 있다.
http://www.kt.rim.or.jp/~fjwrmsyk/ghibli/mimisuma.htm
http://mimisuma.s22.xrea.com/shas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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