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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blanc(2003-06-19 19:20:41, Hit : 5190, Vote : 1080
 시미즈 레이코 [비밀]

그림이 주는 인상과 만화의 내용.- 만화의 표리란 일치하는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때도 있다.
시미즈 레이코는 지독할만큼 일치한다. 그림체나 내용이나 매끈하고 빈틈 없는 유리구슬같다.

<비밀> 은 작가에게 익숙한 근미래-20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과학수사물’로, 시미즈 레이코의 특기인 기발한 설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중심인물은 성실하고 인간미 넘치는 아오키 조사원과 냉철한 상사 마키(스컬리랑 멀더;;).
이런 만화에서 으레 그렇듯 주인공 보다 더 중요한 설정은 [피해자의 뇌를 스캔해서 영상으로 재현해내는] MRI라는 장치인데, 주인공들이 이 장치를 써서 해결하는 사건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고 있다.
MRI는 지난 5년 간의 영상을 보여준다, 시각만을 재현할 뿐, 청각을 비롯한 기타 감각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등등 복잡한 매뉴얼이 붙어있다.(이런 기본 사용법은 주인공 뿐 아니라 독자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시미즈 레이코의 스토리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건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을 그린 <엘레나와 잭 시리즈>에 보면 얼마나 많은 아이러니들이 등장하나.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22XX>야말로 연속되는 아이러니다. 잭은 쓸모 없는 식욕 때문에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식욕을 거세하지만, 결국 루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그에게 그렇게나 저주스러웠던 '식욕'이었다.
엄청난 생존력을 자랑하던 루비는 자신의 생명과 마찬가지인 팔을 잭에게  뚝 잘라주지만, 그는 하필 ‘먹는 행위’가 불가능한 존재였다.
(물론 이 만화도 보기 위해선 기본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비밀> 역시 여러가지 아이러니가 주인공을 괴롭힌다. 범행 장면의 모든 영상을 봐버린 조사관 마키의 뇌가 결국은 어떤 범죄자가 가지고 있을 심상보다도 흉악한 장면을 담은 범죄영상의 백과사전이 되어 버리며, 조사관은 조사대상인 연쇄살인범에게 프라이버시를 엿보는 행위의 비윤리성을 통렬하게 비난당한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갈등과 고뇌가 사건의 해결과 양 축을 이루며 만화는 진행된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시각에 대한 인지,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뇌의 주인이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시계가 흐려지기도 하고, 상상이 영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등, [시각]의 기록이라는게 있는 사진 찍듯이(물론 사진에도 주관이 개입되긴 하지만) 사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주관에 의한 것임을 암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꿈’의 영상을 보는 장면이었다. 이 작품의 매뉴얼에 의하면, 이 시대의 꿈이란 [인간의 육체시계에 의해 발생하는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뇌의 랜덤 활동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의미 없는 것으로,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다]고 한다.
꿈이 심리활동이건, 뇌의 랜덤 활동에 의한 의미 없는 장면 나열이건간에, ‘꿈’이라는걸 시각을 통해 얻은 정보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는게 신선했달까.
하긴 일본어로는 ‘꿈을 본다’라고 하니까, 일본어의 영역에서 ‘꿈’이란 시각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잘하면 하나의 거대한 메타포로 해석할 수도 있을거 같다. 그러나 시미즈 레이코의 만화를 볼 때 거기 나오는 장치들은 그걸 통해 다른 해석의 여지를 그다지 제공하지 않는다. 상상의 한계를 시험하는듯한 기발한 설정은 그 이야기 안에서 톱니바퀴가 물리듯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하나하나의 장치가 플롯 속에서 소비되어 버린다.  그걸 현실의 나와 연결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킬 여지따위 애초에 없는 것이다.
시미즈 레이코의 세계가 그 안에서 완벽하다고 느끼면서도 나와는 차원이 다른 저 별 너머 세계 같은건 그 때문일거다.
그래서인지 난 이 여자 작품에서 가슴에 와닿는 무언가를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름다운 그림들은 언제나 차가웠고, 완벽한 스토리는 공허했다.

이 만화를 보고 다시한번 생각했다.
난 아마 시미즈 레이코의 만화에 감탄은 할 수 있을 지언정 좋아할 수는 없을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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