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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2012-12-03 11:01:31, Hit : 2098, Vote : 309
 [the Ballet Called Swan Lake] ch.3

ch.3 차이코프스키와 '백조의 호수' 음악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보트킨스크에서 1840/5/7에 태어났다. 표트르는 캄스코-보트킨스크 광산과 야금 작업의 검시관인 육군중령, 일리아 페트로비치 차이코프스키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3번 결혼하였는데, 표트르의 어머니인 두 번째 부인은 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온 프랑스 망명귀족의 손녀딸이었다. 그는 유쾌한 매너의 신사, 밝고 사람들을 잘믿는 성격, 가족들은 부유했고 친절했다. 그의 두번째 부인은 피아노를 잘 치고 노래를 잘 불렀다. 모차르트, 로시니, 도니제티와 벨리니와 같은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orchestrion(barrel-organ, 손풍금의 일종)도 있었다.

표트르의 교육은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 맡겨졌고 이는 4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마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 음악에 대한 열정, 소리와 리듬에 대한 비정상적인 민감함이란 매력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루기 어려운 아이처럼 보였다. 낮 동안 그의 머리 속의 멜로디를 쫓았고, 밤에도 같은 이유로 때로 잠들기 어려워하곤 했다. 1년 후 그의 부모가 음악의 기초를 가르치기로 젊은 여성과 계약하였으나 제자가 선생을 능가했기 때문에 그녀의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1848년 2월 차이코프스키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요직을 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보트킨스크의 그의 지위에서 사임, 그러나 무산된 희망, 가족은 페테르부르크로 이사, 이 때 표트르는 기숙학교로 보내졌는데 그 환경이 어린 소년에게는 좋지 않았고 그는 몸이 아프고 게을러졌다.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아서 의사는6개월간의 완전한 휴식을 처방한다. 이 시기 전 그의 아버지는 페름에 있는 공장의 매니저 자리를 확보했고, 가족은 다시 Alapeyevsk로 이사했다.



약 1년 후, 아들을 변호사로 만들고자 결심하여 1850/9월 그의 어머니는 그를 페테르부르크로 데려온다. 그는 이른 10월 입학시험을 통과하여 법학대학의 2년 (준비)코스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머니와 헤어질 무렵, 시험합격 1주일 후, 그는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의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는 Alapeyevsk로 돌아오기 전 그를 글린카의 오페라, ‘차르의 일생’에 데려갔고 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대와 달리 그는 새로운 학교에서 잘 지냈다. 1851년 여름 그는 휴가를 떠났고 음악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전반적으로 학업을 잘 해냈고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보기좋은 외모를 유지했다. 때때로 그의 방에서 남몰래 우울함에 사로잡혔지만.

1854년 6월 그의 어머니가 콜레라에 걸려 죽은 것은 어머니에 대해 병적일 수준의 애정을 가진 그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 아버지 또한 독감에 걸렸으나 회복되었고 Oranienbau으로 이사하였다.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는 노력으로 그는 음악에 집중했다. 그의 첫 작곡으로써 왈츠를 작곡했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그는 음악공부를 증가시켰다. 노래수업을 들었고 자주 콘서트와 오페라 공연에 참석했다.

다음 해 아들의 지속적인 간청에 답하여 그의 아버지는 그가 유명한 선생 R.V.Kindinger에게서 음악 개인교습을 받도록 해주었다. 후에 아버지는 교사에게 표트르가 음악에 전념할만한지 물었고, 선생은 그가 재능을 보이기는 하나 아직 천재적인 사인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 결과 표트르는 법공부에 집중하도록, 법무부에 자리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형과 살기 위해 떠났고, 변화는 아들이 새로운 지인들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들 중에는 나폴리인 성악교사 피치올리, 젊은이처럼 꾸민 70세의 늙은이,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나온듯한 이상한 캐릭터, 가 있었다. 이 이상한 짝은 견고한 친구 사이가 되었고 표트르는 그에게서 음악의 다양한 측면에 관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얻었다.

1859/5/13 표트르는 최종시험을 성공적으로 합격하고 정부관료의 자격을 주는 학위를 받았다. 그는 법무부에 소속되었고 1년이 지나지 않아 부 대표의 시니어 보좌관이 된다. 그의 커리어는 확실해 보였고 그는 저녁을 오페라, 발레, 연극 등 극장에서 보냈다. 사회적 활동은 음악에 대한 심각한 공부로 대체되었다. 그는 환상적인 발레 또는 동화세계의 발레세트를 가장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진정한 소명을 알게 된 것으로 보였고, 그가 음악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키도록 독려했다.

1861년 여름 차이코프스키는 사업상 서유럽에 가는 지인의 통역을 제안 받아 독일, 벨기에, 영국, 파리를 갔다. 파리에서 그는 콘서트와 오페라의 향연을 즐겼으나, 그의 고용주와 싸우는 불행으로 페테르부르크로 혼자 돌아왔다. 그는 Russian Musical Society(RMS)-안톤 루빈스타인을 교장으로 유명한 교사들과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설립-가 후원하는 수업에 참여하며 음악이론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열정적이었고 수업에 흥미있어 했다. 법무부에서 일을 마치자마자 그는 음악원에서 배우거나 집에서 연습하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

그를 반주자로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바라던 정부의 지명을 얻는 것을 실패하고, 그는 이를 자신의 커리어를 음악에 전념하는 구실로 이용하였다. 당시 23세인 그의 전망은 밝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재정적으로 어려웠고 그에게 적은 용돈, 기숙학교와 방 하나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침대와 책상만으로 단조롭게 꾸며진 작은 방에서 그는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기 위해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첫 작곡과 오케스트라 편성 시도는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연습의 속성의 것이었다. 그의 선생 루빈스타인은 그가 멘델스존과 슈만의 작품을 모델로 삼길 바랬다. 그러나 RMS가 조직한 콘서트들에 참석한 결과 글린카, 베를리오즈, 바그너 같은 정통적이지 않은 오케스트라 색채의 대가들의 작품에 훨씬 이끌렸다. 그의 첫 성공적인 작곡 중의 하나는 일련의 페전트댄스들, 이는 운좋게 요한 스트라우스의 콘서트에서 그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그는 다음으로 B단조의 현악4중주, F단조의 서곡을 작곡한다. 그리고 그는 쉴러의 ‘환희의 송가’를 위한 칸타타를 작업한다. 이 곡으로 그는 학위와 은상을 받았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차이코프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안톤의 형제)로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 이론을 가르치라는 초대를 받았다. 지위를 수락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근엄한 안톤과는 달리 와인, 여자, 카드를 사랑하는 니콜라이와 빠르게 친해졌고, 또한 많은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황실 오페라의 감독, 베기체프도 있었다.

이 시기 차이코프스키는 과로와 열등감 콤플렉스에 집착함으로써 매우 민감한 신경쇠약 상태였다. 그는 교향곡 ‘겨울의 꿈’을 작업하였고, 차르의 아들과 덴마크 공주의 결혼을 축하하며 덴마크 전통찬송가에 바탕을 둔 서곡을 작곡하였다. 페테르에서 환영을 받은 교향곡은 모스크바에서 의심할 바 없이 성공했다. 다시 연주되기까지 16년이 흘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은 아마 그가 지역의 유명인사로서의 지위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차이코프스키는 오스트로프스키의 연극, ‘보예보다’에 바탕을 두고 극작가가 리브레토를 제공하기로 한 오페라를 쓰려고 생각했다. 이 오페라는 결국 1869/2/11에 만들어졌다. 프리미어는 성공적이었으나 부정적인 비평으로5회만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주코프스키의 동명의 시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오페라 ‘운디네’를 작업하였다. 몇몇 발췌본이 1870년 모스크바에서 공연되었으나 대부분 실패하였고 작곡자는 후에 악보를 파괴했다. 오직 3 곡만이 남았고, 그 중 하나는 백조의 호수에 도입되었다.

1868년 이른 6월에 라자리, 실로프스키, 베기체프와 함께 베를린과 파리 방문을 포함하는 서유럽투어를 나선다. 9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볼쇼이 극장에 이탈리아 컴퍼니의 오페라를 보러 가서 프리마돈나 데지레 아르토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그와 결혼할 것처럼 믿게 하였으나 스페인 출신의 바리톤과 이듬해 결혼한다. 이 의외의 사건이 그에게 엄청난 굴욕을 주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 때때로 머무른, 작곡가 발라키에프는 차이코프스키와 친분을 쌓았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서곡을 작곡한 그는 친구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곡을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1870/3/16 모스크바에서 공연되었다. 작품은 실패하였으나 오늘날 그것은 콘서트 프로그램에서 인기있는 작품이다. 3월초에 차이코프스키는 세 번째 오페라(Oprichnik)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작곡은 천천히 진행되었고, 그는 4막 발레, 페로의 신데렐라의 작곡을 계획하였다. (불행히도 그가 포기한 아이디어)
1871/3/28, 처음으로 전곡 차이코프스키 작품의 콘서트가 모스크바에서 성공적으로 열렸다. 6월에 휴가를 간 그는 누이와 카멘카에서 시간을 보냈다. 조카들을 위해 그는 작은 발레음악을 작곡하였는데 그 제목이, ‘백조의 호수’이었다.  

그는 예민한 우울상태로 음악원에 돌아왔다. 그는 티칭을 포기하고 작곡에 전념하기를 바랬으나 선생의 급여 없이는 살수 없었다. 그 때 실로프스키는 베를린, 파리, 니스에 방문할 것을 제안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동행하였다. 유럽에서 돌아온 차이코프스키는 작곡에 전념했다. 그는 오프리치니크와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이 의뢰한 페스티벌 칸타타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는 카멘카에 가서 그의 두 번째 심포니 작업에 착수했으나 지쳐있었고 휴가를 가기로 결심, 키에프를 여행하고 그 후 우소보로 가 꾸준히 심포니를 작업한다. 그는 1872/8월 느즈막히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 해12월 그는 결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1873/2/7, 두 번째 심포니가 모스크바에서 공연되었고 열정적인 지지를 받았다. 3월에 그는 ‘눈 아가씨’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도록 초대받았다. 6월에 그는 다시 독일, 스위스, 파리에서 휴식을 취했고 8월에 모스크바에 돌아왔다. 다음해 그는 두 번째 현악4중주를 작곡한다. 다음으로는 템페스트를 위한 음악을 썼고, 12/19일 모스크바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1874/4/24, 오프리치니크를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 열정적 환호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반응은 나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상심했고 작곡가로서 그의 능력을 의심했다. 마침내 그는 코믹오페라, ‘대장장이 바쿨라’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1달 안에 작곡했고 오케스트라 편성하여 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그리고 그는 우소보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3번째 심포니와 황실극장의 감독으로부터 의뢰받은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 두 작품을 하기를 원했다. 그는 카멘카로 이사했고 거기서 심포니의 작곡을 마치고 발레작곡을 시작했다.



1876년 말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들을 의뢰 받았는데, 이는 그보다 9살 연상의 부유한 미망인이자 그를 존경하고 보다 많은 그의 작품을 원한, 나데즈다 필라레토프나 폰 메크, 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교육을 잘 받았으며 음악을 사랑한 그녀의 아버지는 저녁의 즐거움을 위해 몇시간 동안이나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이는 그녀의 취향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용돈을 지급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만나지 않았으나 이 후원은 14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녀의 지속적인 격려와 후윈은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그녀는 (한 사람으로서의)그가 음악가로부터 많이 다를 것이라 느꼈기에 만나지 않았을까? 한 편지에서 그녀가 말하길, 나를 더욱 매료시킬수록 나는 당신을 아는 것을 꺼리게 된다. 그러나 재능있는 작곡가는 정상적인 관계에 적합하지 않았다. 때로 그러한 관계는 의심스러운 수준의 친밀감을 동반했다.

이 시절 그는 안토니나 이바노프나 밀류키나라는 28살의 전 콘서바토리 학생,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그녀의 열정이 보답받지 못하면 자살을 암시한 예쁜 여인과 만났다. 그는 그녀를 거절한다면 따를 결과를 두려워했고, 정부로 삼거나 그녀와 결혼하는 선택을 마주하여 후자를 택하였다. 1877/ 6/18 모스크바에서 결혼하고 후에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그녀는 그에게 육체적으로 불쾌감을 주었다.
그는 코카서스로 도망갈수 있도록 자금을 대준 폰 메크 부인과의 플라토닉한 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그곳에서 그는 휴식하며 그의 불행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마음을 바꿔 카멘카로 가서 4번째 심포니를 오케스트라 편성하고, 다른 오페라 작업, ‘에프게니 오네긴’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있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느꼈다. 그들의 재결합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는 걱정으로 인해 이성을 잃게 되었고 어느날 저녁 폐렴에 걸리기를 원하며 모스크바강의 얼은 물로 걸어갔다. 이것이 실패하였을 때 그는 친구에게 그를 페테르부르크로 부르는 전보를 보내도록 시킨다. 거기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심각하게 아팠고 이틀 동안 코마상태에 있었다. 의사는 현재의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혼은 불가피했다.

10월 그는 그의 결혼과 이상한 행동들로 불러일으킨 가십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원하며 서유럽으로 떠났다. 스위스의 조용함은 그의 고통받은 신경에 치료제였다. 여기서 그는 연간 700파운드의 지원을 결심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폰 메크 부인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유럽을 여행했고, 파리에서 들리브의 실비아, 비제의 카르멘을 듣고 크게 매료되었다.
6개월의 유럽체류 후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 다비도프와 함께 지내기 위해 카멘카로 간다. 그는 부인을 만날까 두려워 모스크바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폰 메크 부인은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녀의 영지에서 몇 주간 체류하도록 그를 초대하여 주었다. 거기서 그는 이혼에 동의하는 부인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법적인 절차들을 마치도록 요구했을 때 그녀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1881년 3월 그는 그의 친구와 출판업자 유르겐슨으로부터 그의 부인이 새로운 연애상대를 만나 아이를 가졌다는 놀라운 소식을 담은 편지를 받았다. 따라서 이혼을 진행시킬 수 있는 입장이 되었으나, 그러기를 꺼렸는데 아마 그의 늘어나는 명성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그녀가 복수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죽을 때까지 그녀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10개의 오페라, 6개의 심포니, 3개의 피아노 콘체르토, 하나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3개의 발레작품(백조, 잠미녀, 호두), 몇몇 연극과 오페라를 위한 배경음악, 상당수의 노래와 피아노 작품 등을 포함한 엄청난 양의 작품을 성취했다.
그는 1893/11/6 페테르부르크에서 죽었다. 11/2 그는 몸이 좋지 않다고 느꼈으나 의사에게 가는 것을 거절했다. 끓이지 않았다고 주의받은 물을 마셨는데, 당시 페테르부르크에서 콜레라 유행에 따른 것임이 의심된다. 그는 급속하게 악화되었고 오락가락한 상태, 그리고 11/5일 코마상태로 접어들고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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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황실극장의 감독에게 초대받아 백조의 호수, 발레작품을 작곡한 것은 1875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제안된 수수료는 800루블, 당시로 8파운드 정도였다. 그는 다비도프와 카멘카에 있는 동안 그 작품을 작업했고, 4년 전 그의 조카들을 위해 작곡한 동명의 작은 발레음악과 통합, 또한 그의 버려진 오페라 운디네의 마지막 막, 운디네와 훌브란트의 사랑의 듀엣 테마가 2장 파드듀의 오데트 바리에이션이 되었다. 이는 Andante nontroppo로 특징되는 멜로디이다. 백조의 호수의 앞의 두 막은 8/26까지 대충 쓰여졌다. 1876/4/4, 1막 곡들의 사전 리허설이 볼쇼이 극장에서 있었다. 다음날 그는 Glebova로 떠났고, 그곳에서 같은 달 22일에 곡을 마쳤다.

네 막에 포함된 많은 곡들의 원래 순서는 1949년 차이코프스키 재단에 의해 발행된 피아노 악보에 주어져있다. 전반적으로 그것은 러시아 발레 전통(코르드발레의 앙상블, 발레리나/프리미어 댄서를 위한 바리에이션과 파드듀, 일련의 캐릭터 댄스들)을 따른다.
백조의 호수의 음악은 교향곡적으로 접근했고 다채로운 오케스트라 편성, 밍쿠스와 푸니의 딸랑거리는 리듬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새로운 발레의 안무가 라이징거는 몇몇 곡들은 좀처럼 춤추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관점은 낯선 것,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 개념의 혁명적인 속성에 대해 충분한 평가이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발레가 걱정한 것처럼 너무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특히 2막과 4막의 음악은 대단히 멜랑콜리하고 달콤한 슬픔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밤부터 동이 터올 동안만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에 걸린 백조아가씨의 가슴아픈 상황을 훌륭하게 전달한다. 그 음악은 마음을 움직이는 서정성과 전원시, 지크프리트와 오데트의 비극적인 결말의 관점에서 묘사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지젤'의 아돌프 아당과 같이 라이트모티프를 활용했다. 이는 특정 멜로디 테마나 구절을 특정 캐릭터 또는 상황과 연결하는 것이다. 비극적인 멜로디의 오보에 솔로의 오데트 주제, 때로 기뻐하고 때로 절망적인 그러나 어떤 리듬의 패턴이 있는 지크프리트 주제, 반면 불길한 분위기의 리듬으로 특징되는 로트바트르 주제는 항상 오데트의 주제와 섞여 있다.
또한 분위기를 창조하는 그의 천재성. 낭만적인 분위기의 호수가 장면과 장대하고 반짝이는 무도회 장면의 대조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데트에 대한 다정한 사랑과 화려한 오딜의 유혹적인 책략에 넋이 나가는 지크프리트를 차별화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가 음악을 사용한 방식은 얼마나 훌륭한가. 마지막으로 춤곡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흐름, 고조, 리듬을 가지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클래식 전통에서 발레음악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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